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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강철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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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른스트는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3세의 아들로,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브루크안데어무어에서 태어났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분할받아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카르니올라를 통치했으며, 1414년 카린티아의 전통 의식에 따라 즉위하여 '대공' 칭호를 사용했다. 에른스트는 내오스트리아의 유능한 통치자였으며,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두 번 결혼하여 프리드리히 3세를 포함한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별명인 '강철공'은 그가 죽은 후에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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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강철공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안톤 보이스의 초상화, 1580년경
안톤 보이스의 초상화, 1580년경
칭호오스트리아 공작
가문합스부르크가
출생1377년
출생지오스트리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브루크안데어무어
사망1424년 6월 10일
사망지오스트리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브루크안데어무어
배우자메클렌부르크의 마가레테
침바르카 마조비에츠카
통치
작위 계승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및 크라인 공작
통치 기간1406년 7월 15일 – 1424년 6월 10일
이전 통치자빌헬름
다음 통치자프리드리히 3세와 알브레히트 6세
가족 관계
아버지레오폴트 3세
어머니비리디스 비스콘티
자녀프리드리히 3세
마르가레타 폰 외스터라이히
알브레히트 6세
알렉산더 폰 외스터라이히
루돌프 폰 외스터라이히
카타리나 폰 외스터라이히
레오폴트 폰 외스터라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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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폰 외스터라이히

2. 생애

에른스트는 레오폴트 3세의 셋째 아들로 브루크안데어무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후 삼촌 알베르트 3세의 보호 아래 성장했으며, 1406년 형 빌헬름이 사망하자 내오스트리아(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크라인)를 상속받았다. 이후 형 레오폴트 4세와 영토 및 후견인 지위를 두고 갈등을 겪기도 했다.

1411년 형 레오폴트 4세가 사망하면서 에른스트는 합스부르크 가문 레오폴트계의 수장이 되었다. 1414년 케른텐에서 전통 의식으로 즉위한 마지막 공작이 되었고, 이때부터 합스부르크 가문 최초로 '대공'(Erzherzog|에르츠헤어초크de) 칭호를 사용했다. 용의 기사단과 성묘 기사단의 일원이기도 했다.

지기스문트 황제와는 대립 관계였으며, 동생 프리드리히 4세와 협력하여 티롤을 방어하는 등 내오스트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유능한 통치력을 보였다.

에른스트는 두 번 결혼했으며, 두 번째 부인 침바르카 마조비에츠카와의 사이에서 훗날 신성 로마 황제가 되는 프리드리히 3세(오스트리아 대공 프리드리히 5세)와 알브레히트 6세 등 여러 자녀를 두었다. 브루크안데어무어에서 사망하여 그라츠 근처 라인 수도원에 묻혔으며, '강철공'(der Eiserne)이라는 별명은 사후에 붙여졌다.

2. 1. 출생과 상속 분쟁

오스트리아 공작 에른스트의 문장 (1627)


에른스트는 브루크안데어무어에서 태어났으며, 레오폴트 3세(1351–1386)와 그의 부인인 비리디스 비스콘티(1414년 사망)의 셋째 아들이었다. 비리디스 비스콘티는 밀라노의 영주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딸이었다. 에른스트가 태어난 직후,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 3세와 삼촌 알베르트 3세는 1379년 노이베르크 조약에 따라 합스부르크 영지를 분할했다. 이 조약으로 알베르트 3세와 그의 후손들(알베르트계)은 오스트리아 공국을 다스리게 되었고, 레오폴트 3세 가문(레오폴트계)은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크라인으로 구성된 내오스트리아 지역과 남은 이스트리아 변경백국, 그리고 티롤 백국과 포어아를베르크 영지를 받았다.

1386년 젬파흐 전투에서 아버지 레오폴트 3세가 사망하자, 어린 에른스트와 그의 형제들인 빌헬름, 레오폴트 4세, 프리드리히 4세는 삼촌 알베르트 3세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다.

1401년 에른스트는 루프레히트를 따라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다. 1406년 그의 맏형 빌헬름이 자녀 없이 사망하자, 레오폴트 3세의 남은 세 아들(에른스트, 레오폴트 4세, 프리드리히 4세)은 상속 재산을 나누기로 합의했다. 1406년 분할 협정에 따라 에른스트는 내오스트리아(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크라인)를 받았다. 동시에 그는 형 레오폴트 4세(당시 레오폴트계의 수장)와 함께, 알베르트 3세의 손자인 미성년 조카 알베르트 5세의 공동 후견인이 되었다. 한편, 티롤과 외오스트리아(포어아를베르크 포함)는 막내 동생 프리드리히 4세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공동 통치와 후견인 지위를 둘러싼 갈등은 곧 불거졌다. 1407년, 에른스트와 그의 형 레오폴트 4세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여 1409년 5월까지 지속된 내전으로 이어졌다.

2. 2. 대공 칭호와 룩셈부르크 가문과의 갈등



1411년 형 레오폴트 4세가 남성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에른스트는 합스부르크 가문 레오폴트 계열의 확실한 수장이 되었다. 1414년, 그는 케른텐의 프린스 스톤에서 카란타니아 전통 의례에 따라 즉위한 마지막 공작이 되었다. 이때부터 스스로 '대공'(Erzherzog|에르츠헤어초크de)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그의 삼촌인 루돌프 4세가 만들었지만 실제로 사용한 것은 에른스트가 최초였다.

같은 해인 1414년, 에른스트는 용의 기사단과 성묘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1412년부터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의 지기스문트 국왕과 관계가 악화되었다.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그의 동생 프리드리히 4세가 대립교황 요한 23세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지기스문트 국왕에 의해 파문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에른스트도 프리드리히의 영토를 직접 장악하려 했으나, 이후 동생과 합의하여 지기스문트의 주장에 맞서 티롤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에른스트는 내오스트리아(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크라인) 영토의 유능한 통치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장남인 프리드리히 3세는 모든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어, 1440년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고 1452년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며 가문의 위상을 높였다.

2. 3. 통치와 사망



1401년 에른스트는 독일 국왕 루퍼트를 따라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다. 1406년 그의 형 빌헬름이 사망하자, 에른스트를 포함한 남은 세 형제(레오폴트 4세,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4세)는 상속 재산을 나누기로 합의했다. 이 협정에 따라 에른스트는 내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크라인을 다스리게 되었다. 또한, 그는 형 레오폴트 4세와 함께 알베르트계의 어린 조카 알베르트 5세(훗날 독일의 왕 알베르트 2세)의 후견인을 공동으로 맡았다. 한편, 막내 동생 프리드리히 4세는 티롤과 포어아를베르크 지역을 받았다.

그러나 1407년, 에른스트와 형 레오폴트 4세 사이에 갈등이 생겨 1409년 5월까지 지속된 내전이 발생했다. 1411년 레오폴트 4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에른스트는 레오폴트계 합스부르크 가문의 실질적인 수장이 되었다. 1414년, 그는 케른텐의 프린스 스톤에서 고대 카란타니아의 전통 의식에 따라 즉위한 마지막 공작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을 '대공'(Erzherzog)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그의 삼촌인 루돌프 4세가 만들었지만 실제로 사용한 것은 에른스트가 처음이었다.

같은 해인 1414년, 에른스트는 용의 기사단과 성묘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1412년부터 룩셈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황제 지기스문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대립교황 요한 23세를 지지했던 동생 프리드리히 4세가 지기스문트 황제에 의해 제국 추방령을 받았을 때, 에른스트는 처음에는 프리드리히의 영토를 차지하려 했으나, 결국 동생과 힘을 합쳐 지기스문트 황제의 압력에 맞서 티롤을 성공적으로 지켜냈다.

에른스트는 자신이 다스린 내오스트리아 영토에서 유능한 통치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장남인 프리드리히 5세는 훗날 모든 합스부르크 영토를 상속받아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으며, 1440년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고 1452년에는 신성 로마 황제(프리드리히 3세)로 즉위했다.

에른스트는 브루크안데어무어에서 사망했으며, 그라츠 근처에 있는 라인 수도원에 묻혔다. 그의 별명인 '강철공'(der Eiserne)은 그가 죽은 후에 붙여진 것이다.

3. 가족과 자손

에른스트는 두 번 결혼했다. 1392년 1월 14일 첫 번째 부인인 포메라니아의 마가렛과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마가렛은 1407년 또는 1410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1412년 1월 25일, 에른스트는 피아스트 왕조 출신의 공주 마조비아의 킴부르기스와 두 번째로 결혼하여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 중 장남 프리드리히 3세 (신성 로마 황제)는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고, 차남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6세는 오스트리아 대공이 되었다.

내오스트리아의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슈타이어마르크 계통의 창시자로서,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를 통해 가문이 이어졌기 때문에 에른스트와 킴부르기스는 이후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모든 황제의 조상이 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3. 1. 첫 번째 결혼

1392년 1월 14일, 에른스트는 첫 번째 부인인 포메라니아의 마가렛과 결혼했다. 그녀는 포메라니아 공작이자 그리핀 가문 출신인 보기슬라프 5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의 아델하이드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마가렛은 사망 기록이 서로 달라 1407년 또는 1410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3. 2. 두 번째 결혼

1412년 1월 25일, 에른스트는 첫 부인 포메라니아의 마가레트가 사망한 후 피아스트 왕조 출신의 공주 마조비아의 킴부르기스와 두 번째로 결혼했다. 킴부르기스는 마조비아 공작 시에모비트 4세의 딸이었다. 시에모비트 4세는 에른스트의 형 빌헬름과의 약혼이 파기되었던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가 결혼 상대로 고려했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에른스트와 킴부르기스는 다음과 같이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생몰년비고
프리드리히 3세1415년 9월 21일 ~ 1493년 8월 19일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마가렛1416/17년 ~ 1486년 2월 12일1431년 6월 3일 작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결혼
알브레히트 6세1418년 12월 18일 ~ 1463년 12월 2일오스트리아 대공
알렉산더1420년 사망
루돌프1424년 이전 사망
카타리나1420년 ~ 1493년 9월 11일1447년 7월 15일 바덴-바덴의 카를 1세와 결혼
레오폴트1424년 이전 사망
안나1429년 11월 11일 사망
에른스트1432년 8월 10일 사망



에른스트는 내오스트리아의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레오폴트계 중 슈타이어마르크 분파의 시조였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가 알베르티니아 가계(오스트리아) 및 티롤 가계보다 오래 존속했기 때문에, 에른스트와 킴부르기스는 이후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모든 황제의 조상이 되었다.

3. 3. 가계도

에른스트 강철공과 그의 아들들


1392년 1월 14일, 에른스트는 첫 번째 부인인 포메라니아의 마가렛과 결혼했다. 그녀는 그리핀 가문 공작 포메라니아의 보기슬라프 5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의 아델하이드의 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마가렛은 상반되는 사망 기록에 따라 1407년 또는 1410년에 사망했다.

1412년 1월 25일, 에른스트는 두 번째 부인인 피아스트 왕조 공주 마조비아의 킴부르기스와 결혼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다.

  • 프리드리히 3세 (신성 로마 황제) (1415년 9월 21일 ~ 1493년 8월 19일)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오스트리아의 마가렛 (1416/17 ~ 1486년 2월 12일) - 1431년 6월 3일에 작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결혼
  •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히트 6세 (1418년 12월 18일 ~ 1463년 12월 2일) - 오스트리아 대공
  • 오스트리아의 알렉산더 (1420년 사망)
  •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1424년 이전 사망)
  •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 (1420년 ~ 1493년 9월 11일) - 1447년 7월 15일에 바덴-바덴의 카를 1세와 결혼
  •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1424년 이전 사망)
  • 오스트리아의 안나 (1429년 11월 11일 사망)
  • 오스트리아의 에른스트 (1432년 8월 10일 사망)


에른스트는 내오스트리아의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래된 슈타이어마르크 계통의 창시자였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를 통해 알베르티니아(오스트리아) 및 티롤 가문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에른스트와 킴부르기스는 이후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모든 황제의 조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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